사상 최악으로 늘어지는 오케스트라. 공연의 흐름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연주였다.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검을 뽑는 순간이었다. 잠들어있던 검이 그의 손에 뽑히는 순간, 쏟아지는 조명 속에서 칼자루에 박힌 붉은 보석이 생명을 머금고 반짝이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시작이었다. 오늘의 아름다운 기억 하나.
시각적 신성함과 엄숙함이 그대로 전달된 객석에서는 오랜만에 박수가 나오지 않았다.
검을 뽑고 멀린이 디딘 바위로 내려오며 이마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기기 위해 살짝 고개를 흔들어 넘겼다. 그 순간에 본 찰나의 시아준수.
적들의 군대가 그렇게 가까이 왔다구요? 기네비어의 놀란 되물음에 기세가 꺾인 아더, “아, 아뇨…” 아차 싶었는지 성급했던 제 아무 말을 잦아들어 가는 목소리로 정정했다. 푹 죽은 정정이 귀여워.
기네비어와 랜슬럿의 대련. 지켜보던 누군가의 혼잣말 같은 한 마디. “진짜 싸우는 거야?” 불쑥 웃겼다.
앓아누웠던 아더, 병상을 털고 일어나며 내내 신경 쓰였던 앞머리를 좀 더 옆으로 정돈하고 등장.
그런데 오늘의 왕관에 무슨 일이. 옆으로 한껏 넘긴 앞머리와 애매한 왕관 위치의 콜라보였을지.
갓 즉위한 임금님. 카멜롯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오늘 웃었다. 애틋한 듯 벅찬 듯. 처음 보는 얼굴.
2막에서 첫 깐아더의 등장. 아무래도 1막 내내 이마에 달라붙었다가 흔들렸다가 종잡을 수 없었던 앞머리가 신경쓰였던 모양.
오래전 먼 곳에서의 마지막 소절. ‘어느새 다가왔어.’ 에서 부드럽게 그려진 미소, 참 예뻤다.
피로연, 멀린에게 잠깐만 다녀오겠다는 눈짓은 그를 등진 민경아 기네비어에게 오늘도 닿지 못했다. 그가 멀린을 향하여 돌아서려는 찰나 뒤늦게 돌아본 기네비어와 눈이 맞자 살짝 엉거주춤하는가 싶더니 양 검지로 총을 쏘듯 그녀를 콕 찍어 인사했다. 금방 다녀올게.
누나와 춤추며 내내 신이 난 얼굴이지만, 춤의 맵시를 잡는 찰나의 순간에는 고혹적으로 내리뜬 눈. 아름다웠다.
깐아더가 되니 기네비어와 춤을 출 때도 표정이 훤히 보여 좋았다.
눈에는 눈, 멀린을 이겨낸 후에 지었던 비릿한 미소.
혼자서 가. ‘생명에 대한 존중 없는 왕’ 비아냥을 정통으로 맞고 욱하던 얼굴.
심장의 침묵 인트로. “날? 니가?” 더 분명해진 비웃음. 니가 나를 막아설 수 있을 것 같아? 뉘앙스 팽배한 ‘니가’와 함께 랜슬럿을 검지로 콕 찍으며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뒤돌아서 상체를 숙이면서는 울음으로 변모하는 웃음. 단계단계 섬세했던 연기.
“좀 더 조심해야 할 텐데.”는 오늘도 위엄있게, 분노를 있는 대로 폭발시켜내는 앞 문장(감히 왕 앞에서 말할 땐)과 확연한 갭이 느껴지도록.
심장의 침묵, 처음 듣는 목소리. 여긴 모두 폐허, 그림자도 흔적도 모두 다 사라진 곳에서 막 다른 길을 만난 음성. 긁히고 상처난 채로 제 아픔을 여실히 드러내던 안쓰러운 목소리. 고슴도치처럼 제 가시를 있는 대로 세워서 섣불리 다가갈 수도 없게 하는, 뼈아픈 고독으로 사무친 그 목소리.
이게 바로 끝. 절망한 동생의 어깨에 이마를 묻는 누이, 참혹한 표정만큼이나 만 갈래로 갈라지던 음성, 소리는 역시 재료일 뿐. 장인은 재료를 가리지 않는다는 불변의 법칙을 재확인시켜준 이게 바로 끝.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처음 보는 멀린의 눈물. 손준호 멀린의 노선 변화일지.
멀린아더, 끝을 앞두고 오늘도 이를 드러내어 선명하게 웃었다. 이런 식의 끝을 바라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가. 회한의 떫은 웃음이었다.
왕이 된다는 것. 무엇도 뜻대로 되지 않는 자리, 왕의 자리. 무게를 절감한 얼굴. 인생이 버겁고 운명이 무거워 짓눌린 이. 버티고 버텨내는 것이 고작이라 걸음 하나 내딛는 것도 비틀비틀하던 그. 이 모든 것이 그의 목소리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삼라만상 전부 다 깃든 그 목소리로 그가 노래를 빚어갔다. 혼신을 다해, 장갑 낀 손을 부득부득 주먹 쥐어가며.
혼신의 노래로 인한 여파였을까. 노래의 마무리에서 주먹을 말아쥐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 혹 모두 쏟아낸 나머지 주먹을 쥘 여력도 없었던 걸까 싶어 울컥.
방패를 받아들고 전장을 향하여 나서기 위해 검을 뽑으려는데, 검집에 박힌 검이 쉬이 뽑히지 않아 살짝 멈칫했다. 아, 검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는가. 가장 울컥했던 순간.
랜슬럿의 최후. 입 모양으로만 보았던 ‘안-돼.’의 비명소리를 오늘 생생하게 들었다.
오늘은 울지 않는 검.
험난한 바위산, 힘겨운 오르막길, 마침내의 정상에서도 평형을 잡기 위해 애를 쓰던 그림자 속의 모습.
커튼콜. 인사를 마치고 배우들과 나란한 줄로 합류한 그를, 신영숙 모르가나와 이지훈 랜슬럿이 동시에 토닥여주었다. 도닥임을 받으며 미소짓던 그. 오늘 밤의 아름다운 기억 둘.
시아준수 부디 푹 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