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수 아더와 김소향 기네비어의 몇 번째일지 모를 역사의 밤. 8월 2일의 〈오래전 먼 곳에서 리프라이즈〉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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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의 행렬을 향하여 닿지 않는 손을 뻗어보았던 그가 멈추어 섰다. 등 뒤의 기척을 느꼈던 걸까. 힘겨운 육신이 비척대면서도 일말의 방황조차 없이 그녀를 향하여 돌아섰다. 랜슬럿을 보내면서도 송두리째 무너지지는 않았던 얼굴에 섧은 빛이 스미기 시작했다. 기네비어, 카멜롯으로 돌아와 줘, 제발. 울음 묻은 애원이 연달아 쏟아졌다.
그런 그를 향하여 그럴 수 없다며 선을 긋는 그녀의 음성에는 자괴와 회한이 가득했다.
난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어.. 어찌저찌 문장을 이어가던 그녀가 결국 울컥하며 단어 하나를 삼켰다.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에게로 그가 성큼 다가섰다. 장갑 낀 손이 덥석 작은 손을 잡았다.
ㅡ오래전 먼 곳에서 상상조차 못 한 순간..
목소리에 소금기가 가득했다.
ㅡ우리의 마지막.
시작하는 소절에서 이미 우는 그는 오랜만이었다. 그의 아더가 김소향 기네비어와 남다르게 공명한다는 건 알지만, 울음으로 엮은 듯한 목소리는 반칙이었다.
아, 그런데.
ㅡ오래전 먼 곳에서..
그녀의 떨군 눈을 찾아 몸을 낮추며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어쩐 일인지 그녀의 손을 먼저 놓나 했더니.. 다급하게 왼손의 장갑을 벗겨냈다. 고이 드러난 맨손을 그녀를 향하여 펴보였다. 울음결을 따라 떨리는 왼손에서 차마 빼지 못한 결혼반지가 반짝였다.
울음이 된 그의 노래가 말했다.
보라며, 그녀를 향하여 보라며.
ㅡ난 맹세했죠, 영원을.
우리의 사랑을 맹세하였던 기억도, 영원의 정표도 여전히 우리 눈앞에 있음을 제발 봐달라며, 그가 그녀를 향하여 손을 내밀었다. 장갑을 벗겨낸 맨손이 마치 밑바닥까지 다 내보인 그의 마음 같았다. 오래전, 피어나는 사랑으로 채웠던 반지가 이제는 눈물로 흥건했다. 흩어진 맹세, 스러진 사랑.. 갈 곳을 잃은 손이 그녀의 눈앞에서 달달 떨었다.
눈물투성이 된 절박함은 이번에도 고스란히 그녀에게 닿았다. 단정하던 무릎이 스르르 무너졌다. 떨리는 양손이 그의 두 뺨을 그러쥐었다. 그녀답지 않은 투박한 손길이었다. 그의 얼굴을 틀어쥐듯 붙든 손길에서는 그녀만의 다정다감하면서도 섬세한 빛이 없었다. 붕괴되어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한 다급함만이 가득했다. 무너지는 그녀의 모습이 아이러니하게도 내 마음을 채워주었다. 그 혼자만의 절박함이 아님을 확인시켜주는 그녀에 안도했다. 다망한 손이 더듬더듬 필사적으로 그의 반지 낀 맨손을 찾아왔을 때에는, 울음에 질리기라도 한 것처럼 새하얀 빛이 된 것을 보고 기뻤다. 동시에 아렸다.
한때는 영원을 나누기 위해 마주 잡은 두 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깨진 영원을 애도하며, 한 손으로 겨우 닿았을 뿐이다.
그것이 섧은 그가 그녀 뺨의 눈물을 훔쳤다. 더없이 애틋한 접촉이었다.
그것이 통한스러운 그녀가 그의 가슴께의 갑옷을 붙잡고 울었다. 한없이 고통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렇게 나란히 울었다. 한뜻 한마음의 눈물로 강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눈물을 나누는 두 사람의 이마가 금방이라도 맞닿을 만큼 가까웠다. 곧 하나가 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하지만 기묘한 벽이 있었다. 가눌 수 없는 눈물에 울음을 터는 몸짓이 격해져서 거리가 좁혀질 만하면, 흐르는 눈물로도 씻어낼 수 없는 상처가 눈물웅덩이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끝은 비극” 이어야만 한다고, 자꾸만 확인시켜주려는 듯이.
운명과의 줄다리기에서 먼저 한발 물러선 쪽은 그녀였다. 조심스럽게 그녀가 반지 낀 그의 손 위로 이마를 맞추었다. 한뜻 한마음의 감촉이 아니었다. 작별을 고하는 최후의 인사였다.
말없이 멀어지려는 그녀를 따라 그가 일어섰다. 몇 걸음 무작정 따라도 가보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한 채 남겨졌다. 어둠이 그보다 빨랐다. 이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고 그녀를 오직 캄캄한 어둠 속으로 삼켜버렸다.
텅 빈 공간에서 그녀가 다녀갔음을 알려주는 것은 장갑을 움켜쥔 그의 맨손뿐이었다.
짝을 잃은 반지가 공허 속에서 반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