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알아서 처리하죠.”

그 대답의 언저리였을 것이다. 그가 알아차렸다. 적어도 오늘의 아더는 이 대화가 멀린과의 마지막임을 알았다. 모를 수 없었을 것이다.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멀린, 두 눈에 그렁그렁한 만감, 마지막 감촉을 확인하는 것처럼 어깨에 닿은 손, 최후의 격려마냥ㅡ내가 없어도 잘해나가리라는 걸 믿는다는 듯이 어깨를 토닥이는 멀린의 손이 전부 ‘끝’을 말하고 있었다.

직감은 곧 깨달음이 되어 그에게 명중했다. 어떤 식으로든 멀린은 죽음으로써 엉켜버린 운명들의 끝을 맺을 작정인 것이었다. 

 

“모르-가나.”

아더이자 멀린인 그가 모르가나를 불렀다. 나직한 음성이 깊이 잠겨있었다. 처음인 일. 웃어 보인 적은 있어도(8월 2일), 울먹인 적은 없었는데.. 멀린의 눈물을 그대로 흡수한 목소리였다. 손준호 멀린의 감정을 고스란히 이어가는 연기였다. 감탄스러웠다. 탁월한 순발력과 남다르게 공명하는 심장이 이를 가능케 했겠지.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무대 위에서 살아가는 그를 재차 실감했다. 그렇기에 염려도 되었다.

멀린의 죽음을 직감한 아더의 마음이 어땠을까.

동료의 눈물을 눈앞에서 그대로 흡수한 시아준수의 마음이 어땠을까.

바위 뒤편에서 사라져가는 전부를 듣고 있을 아더이면서 동시에 시아준수일 그 마음은 대체 어땠을까.

 

오늘의 왕이 된다는 것은 곧장 그 물음에의 대답이었다. 어둠이 걷히고 안개 낀 빛 아래 그의 얼굴이 드러났을 때, 평소보다 일렁이는 눈빛에서 설마 했는데..

아, 눈물의 노래였다. 

늘 전부를 잃고 나아가며 부르는 노래였지. 오늘은 그 ‘전부’ 안에 멀린과 모르가나마저 있었다. 오늘의 그가 얼마나 힘겹게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는지..

선명한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흐르는 왕이 된다는 것은 처음이었다. 

노래하는 와중에 울컥한 적은 더러 있었지만, 노래가 울음에 먹히도록 몰아치는 파도 같은 감정의 왕이 된다는 것도 처음이었다. 

호흡을 울음에 양보하여 소절을 밀고 당겨야 했던 왕이 된다는 것도, “진실 앞에 서서”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울음을 찍어낸 것도 모두 오늘이 처음이었다.

자, 와, 가! 에서 늘 눈물 어렸어도 단단했던 외침들이 오늘은 한사코 떨쳐 일어나려는 절규로 변해있었다.

 

그래서 눈물의 전쟁이었다. 비장한, 장엄한, 눈물겨운 전쟁이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튕겨 나가는 빗방울이 꼭 그의 눈물 같았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땀까지도 전부 눈물인 것만 같았다.

 

케이를 위시한 원탁의 기사를 모두 잃고, 결국 죽어가는 랜슬럿을 품으로 끌어안았을 때는 멈출 줄 모르고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절대 형을 용서하지 말라는 엄기준 랜슬럿의 마지막 말은 오늘도 그를 무너트렸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육신의 매무새를 정돈해주며 그는 계속해서 랜슬럿의 얼굴을 확인했다. 두 손에 검을 포개어주다가도 얼굴을 보았고, 옷깃을 매만져주다가도 죽은 이를 보았다. 사랑하는 형이 당장에라도 사라질까 봐 두 눈에 계속 담아두려는 아이처럼.

 

기네비어를 향하여 한쪽 무릎을 꿇는 동작은 경련을 일으킨 듯 다급했다. 서둘러 장갑을 빼내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거동 하나하나가 비끗댔다. 왼손 약지에 여전한 반지를 그녀의 눈앞으로 내밀며, 제발 보라며, 이것을 봐달라는 애원으로 덜덜 떠는 손은 두 번 보아도 눈물의 기폭제였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그 절박함이 그녀에게도 모종의 도화선이 되어주었다는 것.

결코 그와 함께 무릎 꿇어주는 법 없었던 민경아 기네비어가 그의 눈높이로 찾아왔다. 처음으로. 그녀가 그와 함께 무릎을 맞추고, 두 사람이 함께 노래를 엮으니 꼭 그와 그녀의 마음이 한뜻 한마음으로 우는 것만 같았다. ‘흐르는 눈물로 상처를 씻어낼’ 수 있기를 바라며 그가 그녀의 뺨을 그러쥐었다. 그녀는 그의 반지 낀 손을 잡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서서히, 두 사람의 마음이 마침내 만나는 것만 같았다.. 고 느끼는 찰나에 그녀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여기까지라는 듯이.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긴 그의 얼굴에서 체념을 보았다. 단호한 그녀를 보면서 그는 벽을 보고 있었다. 거절된 마음, 단절된 사랑 앞에 그의 반지 낀 맨손이 마주 잡을 손을 잃었다. 

남겨진 그의 맨손이 너무도 슬펐다. 물기 가득한 손등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제가 흘린 눈물로 손등이 얼룩덜룩했다. 눈물의 파편들이 흐르지도 못한 채 손등에 그대로 맺혀 있었다.

마땅히 흘러야 하는 데도 흐르지 못하는 눈물과, 온기가 아닌 눈물로 적셔진 손등이 너무나도 그 자신 같았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채 멈추어 선 그를 꼭 닮았다.

 

남겨진 그를 위해 검이 울었다. 

눈물로 얼룩졌던 왕이 된다는 것을 위해 검이 울었다. 

단 한 방울이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운명이 그의 곁에 있었다. 모든 절망과 참혹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운명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참담한 그 미래도 다 내 운명인가요, 묻는 아더를 보는 멀린의 얼굴이 놀라우리만치 엄격했다. 좋게 말하면 단단했고, 솔직하게는 차가웠다. 조력자라기보다는 제 새끼를 벼랑 아래로 떠미는 맹수 같았다. 운명을 향하여 떠밀린, 고작 18세일 뿐인 아더가 조금 안쓰러웠다. 이 노래를 통해 스스로를 다잡아 결국 엑스칼리버를 향하여 나아가는 모습은 대견했고.

 

〈검이 한 사람을〉, 기사 서임을 기다리는 엄기준 랜슬럿을 바라보며 “모야?” 묻는 세모꼴 입 모양. 오늘도 귀여워.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민경아 기네비어의 주먹 콩이 세 번이 되었다. 💦💦 

문득 이 넘버에서 배우 김준수와 그의 아더가 오늘로 막공을 올리는 배우들을 배웅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신영숙 모르가나, 엄기준 랜슬럿, 손준호 멀린, 이종문 엑터, 민경아 기네비어 모두 오늘로 하루 먼저 엑스칼리버를 떠난다. 함께해온 동료의 절반이 떠나는 날에 오직 이상준 울프스탄과 그만이 내일의 공연을 남겨두었다. 그러니 꼭 그가 떠나가는 배우들을 배웅하는 듯한 감각을 삭일 수 없었다. 주연배우로서 끝까지 극을 책임지고 이끌어가며, 모든 캐스트와의 막공을 함께하는 이. 

기네비어의 노랫말대로였다. 우리가 원한 건 영웅이 아닌, 함께 싸워줄 사람.

 

〈왜 여깄어?〉, 한쪽 허리를 짚은 채로 누나에게 다가가는 그를 보며, 잠시지만 감기 기운이 남은 목소리가 상황상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도 누나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는 그가 참 눈물 나게 애틋했고.

그리고 여기 1막에서 유일하게 숨 돌리는 시간, 땀에 젖어 갈라진 앞머리를 단정하게 새로이 빗고 나온 아더. 아이 예뻤다.

 

〈기억해 이 밤〉. 갓 임금님이 된 청년은 오늘도 카멜롯 사람 한 명 한 명을 깊이 눈에 담았다. 옅은 미소, 굳건한 입매, 떨림과 각오가 뒤범벅된 눈으로.

손준호 멀린, 절치부심의 왕관. 예쁘게 씌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래전 먼 곳에서〉. 우리의 사랑 시작‘해’의 발성이 남달랐다. 잘라서 듣자.

피로연, 신영숙 모르가나의 조심스러운 춤사위에는 기분 좋게 웃었다. 어제의 그녀가 시동 거는 모습을 보아서 그런지 오늘은 놀라기보다는 한껏 즐거워했어. 누나와 춤을 추다니! 아이 신나! 하는 것처럼.

잔뜩 신이 나서 그랬나. 유독 건배의 타이밍이 버벅버벅. 아버지의 함께 건배하자는 손짓을 보지 못하고 나홀로 원샷을 하고 나서야 아차, 머쓱하게 웃더니 검지로 잠깐만 잠깐만요, 새 잔을 가져와서 짠.

 

“감히 왕 앞에서 말할 땐!” 찰나에 일그러지며 고통을 호소하는 눈동자를 보았다.

“아버지”를 찾는 음성, 이어지는 〈심장의 침묵〉은 송두리째 아이의 것이었다. 머리를 넘겨 한껏 스타일링을 했어도 껍데기일 뿐. 알맹이는 중추도 의지처도 잃은 채 방황하는 소년이었다. 깐아더일 때는 이 대비가 극명하게 눈에 보이는 탓에 더더욱 슬픈 심장의 침묵.

 

〈이게 바로 끝〉의 아더, 오늘은 바위를 건드리지 않고 바라만 보았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해!”는 완연한 역정이 되었다.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순간에는 오늘도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기네비어의 귓가를 맴돌다 꽉. 화산처럼 쏟아져나오는 분노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멀린을 찾아 울부짖는 음성이 길게 늘어졌다. “왜 나를 혼자 버려둔 거야, 왜애애애..”

배신당했다며 말하는 뒷모습이 너무나 아이의 것이었다. 영락없는 아이였다. 깐아더의 외양이 되니 겉과 속의 대비가 더욱 두드러졌다. 번듯하게 잘 컸지만, 내면은 곪아버린 아이. 딱 그 순간의 아더였다.

 

〈왕이 된다는 것〉. 오늘의 눈물을 보는 순간 엑스칼리버가 울 것임을 예감했다. 그리고 실제로 울었다. 마치 그의 눈물에 화답하듯, 공명하듯, 검이. 울컥한 와중에도 자릿했다. 엑스칼리버는 어떻게 반드시 울어야만 하는 타이밍에만 눈물을 흘릴 수 있지, 정말로 그의 심장 파편이라도 된단 말인가. 의아할 정도의 전율과 함께.

노래 내내 울었는데도 전장을 향하여 나아가며 손으로 눈물을, 코를 훔치지 않았던 것 또한 정말로, 정말로 좋았다. 그저 단단하게 울음을 삼킬 뿐인 모습이 그 자체로 아더인 동시에 시아준수였다.

 

〈평원에 날 묻어〉에서 떠나는 행렬을 향하여 “가지마..”라고 오늘도 읊조렸던 입술. 비틀비틀, 발을 질질 끌며 따라가던 지친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