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음향이 가장 좋지 않았다. 귀를 의심해야 할 정도로. 사람은 눈앞에 있는데, 소리는 벽 뒤에서부터 돌아돌아 오는 감각.. 고통.. 공연이 좋았기에 더욱 아쉬웠다. ㅠ

 

오늘은 처음으로 A에 가까운 B. 생각했던 것보다도 각도가 많이 달라지는 덕에 다채로운 시야를 만날 수 있었다. 즐거웠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얼굴이 곧바로 정면이었다.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온 얼굴로 주님을 찾는 이 표정을 이렇게 바로 마주한 적은 없었는데, 기뻤다. 

정말 특별한 사람이죠, 하하, 하하. 나란히 웃다가 급 정색으로 바뀌는 얼굴과 운명을 믿어요? 묻는 얼굴도, 이교도 군주에게 경고할 때의 강직한 눈도 시원하게 트인 각도로 바라볼 수 있었다.

특히 〈왜 여깄어〉의 마무리ㅡ모르가나와 깊게 포옹할 때, 누이 어깨너머의 눈동자를 보았다. 어둠이 살짝 내려앉은 눈동자가 진지하고도 상냥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이 눈을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 시작으로 돌아가서, 〈변하지 않을 영원한 연대〉. 랜슬럿에게 몸을 한껏 기댄 채 풀어지는 얼굴, 오늘은 소리도 내어 웃었다. 흐힛. 도리안 막공의 ‘힛’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었다. 귀여웠어 정말.

주먹 쨉쨉에 점프를 실어 몸을 날리다, 착지하며 살짝 균형을 잃을 뻔했다. 생일이라 한껏 흥을 내는 것도 좋지만 조심해야 해, 아더. 

 

“이럴 때마다 내가 정말 싫어요.” 는 10일의 억양을 이어갔다. 아더라는 인물의 해석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관객에게는 어제와 오늘이 다를 수 있도록 새로운 디테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그를 느낄 수 있는 대목.

“원하는 게 뭡니까,” 아버지 앞을 막아서면서는 멀린을 검지로 콕 찍었다.

 

“우더 펜드라곤에 대해 내가 아는 건 탐욕과 분노!” 

친부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는 얼굴이 몹시도 괴로워 보였다. 

“..복수에 눈먼 짐승이었다는 것뿐이죠!”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를 부정하고 짓이기는 듯했다. 엑터를 아버지로 믿고 존경하며 살아온 세월 전부가 철저히 조각난 마음이 오죽할까. 멀린이 그에게 심어 넣은 혼란을 가늠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제 용과 맞서 봐.”

처음 겪는 불길 앞에 뒷걸음치는 아더의 앞으로 나서는 엑터를 보았다. 아더와 멀린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아들이 주춤주춤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아버지가 나섰다. 할 수 있다고, 마주해보라고. 혼란 범벅이던 얼굴이 아버지의 격려를 만나 차츰 진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아더 부자의 관계, 너무나 이상적. 

 

엑스칼리버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하여 스스로에게 되물을 때ㅡ“내 안에 불타고 있는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까..”ㅡ주먹을 쥐며 입술을 깨무는 얼굴에서 각오를 보았다. 얼마간의 망설임이 있어도 오늘의 그는 꽤 단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칼을 뽑기 위한 마지막 시도. 가르침을 따라 숨결을 불러오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으며 선명하게 스쳐갔던 입꼬리의 미소. 어느 때보다도 분명한 미소였다. 후반 멀린아더일 때도 그렇고, 오늘 그간에는 살짝만 비추었던 웃음을 확연한 미소로 탈바꿈시킨 장면이 많았다.

 

〈검이 한 사람을〉. 

“멀린, 내가 왕이 될 운명이라고 해도.”

마이크가 나오지 않았다. 정적에 놀람도 잠시, 상황을 인지하고 생목소리에 힘을 불어넣는 그를 보았다.

“누가 나 같은 사람을 따르겠어요.”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이 넘버에서였다. 역시 B가 좋다고 생각했던 것. 듀엣이 되는 순간의 얼굴을 너무나 아름다운 각도로 만날 수 있어.

그리고 귀여웠던 오늘의 애드립. “마법사가 아니라 점쟁이였나?” 어미만을 살짝 바꾸었을 뿐인데, 느끼기에 그간의 문장 중에서 제일 자연스러웠다. 센스 있지. 귀엽기도, 웃기기도 하였고.

김준현 멀린의 대사도 바뀌었다. “저 여자가 미래에 너의 왕비가 될 거야.”

“왕비?” 되묻는 엑터의 목소리에서 오늘 느껴진 건 기대감. ‘그럼 우리 아들이 정말 왕이 되는 것인가’

 

〈이렇게 우리 만난 건〉. 또 보았다. 바위에서부터 밀쳐져 나왔다가, 쏜살같이 복귀하는 모습. 발각되어 나란히 나올 때도 랜슬럿이 그를 떠밀어, 먼저 와당탕 앞으로 나오곤 한다. 박강현 랜슬롯과는 아무래도 이 디테일을 정착시키기로 한듯하다. 

오케스트라를 따라 박자를 밀고 당긴 오늘의 소절은 도입부의 “이게 운명의 시작이 맞다면 ‘알것-만’ 같아.” ‘알’을 너무나도 빠르게 ‘것’으로 대체하며 박자를 당겨왔다. 그에게 항상 놀라운 건 이렇게 박자가 징검다리 건너며 튀어도 노래를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이어간다는 점. 애먹으며 끌려가지 않고, 자신을 향하여 끌어온다는 점.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한 마지막 순간, 그의 가슴 위로 그녀의 손이 살며시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포개어진 손이 가만히 그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의 같은 상황에서 그의 손을 피해, 스스로에게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두어들인 그녀가 이제는 인정한 것이다. 그에게 끌리는 마음을. 두 사람이 운명도 우연도 아닌, 인연임을.

 

〈이렇게 우리 만난 건 리프라이즈〉. 김소향 기네비어의 ‘사랑해요’가 새 감정을 입었다. 그간이 읊조림이었다면 오늘은 잠자는 그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그가 듣고 있기를, 듣고 있다면 이 목소리를 따라 깨어나 주기를 기원하는 목소리였다. 음절마다 바람을 꼭꼭 눌러 담은 그녀의 부름을 듣고 그가 눈을 떴다. 잠자는 왕자님이 깨어난 것이다.

 

〈왜 여깄어?〉. 오늘은 유독 이 넘버 구석구석에 포진한 카멜롯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기네비어의 얼굴, 케이, 가웨인의 얼굴. 모두가 하나와 같이 염려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혼란스러운 미간이 말해주었다. 진심으로 아더를 염려하고 있음을.

 

〈기억해 이 밤〉

“네, 그러겠습니다!” 시원시원한 대답에 이은 “네! 그러겠습니닷!”

두 번째 대답의 강도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오늘은 그러겠습니‘닷’으로 들릴 만큼이나 의욕적이었다. 소년과 청년 사이에 선 혈기, 힘이 넘치는 우리 아들. 딱 그 모습이었다.

 

사실 이 넘버에서 늘 말없이 보게 되는 건 투명하게 반사되는 갈색의 눈동자. 하얗게 번지는 조명 덕에 눈동자의 갈색빛이 무척이나 선명하게 보이는데, 너무나 예뻐요.

그 갈색 눈동자로 카멜롯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의 기사들, 나의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눈에 담으며 각오를 다지는 이, 많은 왕을 대신하여 온 단 하나의 왕이었다.

 

덧붙여 김준현 멀린. 오늘 왕관을 씌워주고는 그의 앞머리를 엄지로 살짝 정리해주는 모습을 포착했고, 놀랐어. 의외의 면!

 

〈오래전 먼 곳에서〉. 두 번째 잔을 마시고 크으 취한 듯 푹 숙이는 고개가 귀여웠다. 기네비어와 시선을 마주하며 ‘나 잠시 멀린에게 다녀올게’ 전하는 듯한 눈인사도 참 예뻤다.

 

멀린에게의 “너도 나가”는 오늘도 나직했다.

 

〈혼자서 가〉. 드럼의 인트로와 테이블 쾅, 이어서의 첫 소절. 시작부가 딱! 맞았다. 와아, 박수. 첫 단추부터 훌륭하게 끼운 오늘의 칼싸움은 그야말로 강강강이었다.

무엇보다.. 오늘 칼싸움 중에 검에서 파편 튀는 걸 본 것만 같은 착시가.. 조명의 반짝임이나 불꽃같은 게 아니라 검의 조각이 쪼개져 튕긴 것만 같았다. 너무 순간적이라 확신할 수는 없으나.. 놀라우리만치 긴박하고 격렬하였던 것만은 사실.

 

“괜찮다잖아,” 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덜 날카롭고 덜 날을 세웠다. 목소리가 조금 지친 듯도 했고.

“근처에 있을게요.”

이리저리 방황하던 눈동자가 부풀더니 딱 멎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되묻는 것처럼 멎어버린 눈동자와 시선이 맞았다. 자신이 기네비어를 해치기라도 할 것처럼 여겨진단 말인가, 충격 스며드는 눈이었다.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그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본다는 건.

“좀 더 조심해야 할 텐데.” 의 톤은 이전으로 돌아왔다. 검지도 올리지 않았다. 그날그날에 어울리는 알맞은 톤을 그때그때에 끌어다 쓰는 느낌이다.

 

극을 보다 보면 어떤 장면이 어느 각도로 담겼을 때 가장 아름다울지 생각하게 되곤 하는데 오늘 새삼 B에서 보는 배경이 예뻤다. 정면이나 우측에서는 앙상하게 마른나무만이 어둠 속에 듬성듬성한 텅 빈 공간인데 반해, 왼측 시야로는 안개처럼 촘촘히 드리운 희끗희끗한 나뭇잎이 보였다. 마치 혼란스러운 그의 마음처럼 흐렸다. 생기 없는 가지는 그의 눈물과도 같은 잎사귀가 촘촘히 맺힌 채로 늘어져있었다. 서정적일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이게 바로 끝〉. “여기서 뭐해?” 묻는 아더와 모르가나가 대각선으로 한 시야에 잡히는 각도. 누이의 핏빛 손과 그 너머의 무구한 얼굴의 동생. 짜릿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이 순간이 함께 담기는 이 각도가 너무 좋다. 

뿐인가. 마지막의 “무너지는 꿈” 너머 그만을 홀로 두고 사라져 가는 사랑과 우정이 한 시야에 담기는 것 역시. B의 각도 좋아..

 

〈이게 바로 끝〉은 가히 오늘의 넘버였다.

“으아아ㅡ” 배신을 향하여 칼을 뽑고 달려드는 비명이 무척이나 길었다. 처절했고.

“너희 둘을 카멜롯에서 영원히 추방한다.” 최후의 선언은 비통했다. 분노보다도 절망이 컸다.

무엇보다 앞머리를 딱 붙도록 고정하지 않아 그의 고갯짓을 따라 곧잘 머리가 흐드러지곤 했는데, 특히 이게 바로 끝에서는 머리카락으로도 연기를 하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그의 분노를 따라 춤췄다. 아름다울 만큼.

 

“멀린, 왜 나를 혼자 버려둔 거야..” 오늘은 다시 울부짖음이 되었다. 흑, 흑흑.. 서글프게 흩어지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떨구고, 검을 지지대 삼아 겨우 버티는 그였다.

 

〈심장의 침묵〉. 정중앙에서부터 왼쪽을 향해 걷기 시작하며 터트리는 부분ㅡ괜히 매섭기만 한 바-람ㅡ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여기, 색달랐다.

평소 ‘바-라암ㅡ’ 어미를 길게 폭발시켜냈다면 오늘은 람을 반박자 더 당겨와서 ‘바.라암’이 되었어. 박자를 당기니 더 급격하게 차오르는 절정의 느낌이 심장을 마구 두드렸다. 이 대목에서면 늘 하는 생각, 저 얇은 몸통의 어디에서 이런 울림이 나오는 걸까.. 가 느낌표가 되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눈에는 눈 리프라이즈〉

“제가 찾아볼 테니 걱정마세요. 랜슬럿은 반드시 우리와 함께 싸워줄 겁니다.”

그를 바라보는 눈들을 보았다. 전쟁을 앞두고 결의에 찬 눈빛들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의 왕을 바라보며, 그 왕과 함께 나아갈 내일을 보면서. 비록 랜슬럿이 없다 하나 한 마음 한 뜻 한 길의 노래였다.

 

〈이야기 되는 이야기 리프라이즈〉. 희열에 찬 모르가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얼굴이 이를 보이며 살짝 웃었다. 희미하게 비소한 적은 있어도 이런 얼굴은 처음. 

 

〈왕이 된다는 것〉. 들은 중 가장, 가장 단단했다. 

울음이 없었다. 나직한 자조는 있어도 절망은 없었다. 오늘의 그는 노래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자기 자신의 갈 길을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자, 와, 가. 외치며 잠시 감정이 맺히기는 하였으나 금세 갈무리했다. 

단단했다. 

울지 않는 얼굴은 그제와 같이 비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패를 건네받으며, 각오의 숨을 삼키며, 왕은 전장으로 나아갔다. 

 

〈기억해 이 밤 리프라이즈〉. 이를 악물어 웃었다. 등 뒤의 바위산을 돌아본 그가, 잠시 그대로 멈추어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앞에 펼쳐진 길을 가늠해보는 것처럼. 

곧이어 한 걸음씩 성큼 걷는 걸음에는 힘이 있었다. 비록 험한 산길을 오르며 발을 헛디디고 비틀거릴 때 있어도 검을 쥔 손을 굳세게 고쳐 잡으며 나아갔다. 검은 그를 이끄는 길잡이이자 동료였다. 

정상에 이르러 웃음 마른 단단한 얼굴도 알고 있었다. 

지금처럼 그가 운명을 마주 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운명 역시 그를 환히 비출 것임을.

 

김소향 기네비어와의 오래전 먼 곳에서 리프라이즈 leaplis.com/580861

샤아더 사랑해.

 

*

이럴 때마다 내 자신이 ‘정말 싫어요.’

잠깐만.. 내 이름을 어떻게 알죠?

저 엑스칼리버 앞에 나 맹세하리

마법사가 아니라 점쟁이였나?

너도 나가, 꺼져!

무릎 꿇은 오래전 먼 곳에서 리프라이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