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곧 〈기억해 이 밤 리프라이즈〉.
완벽했다. 오늘 단계단계의 섬세함을 무엇으로 이루 말할 수 있을까. 엔딩의 그가 ‘웃음을 지어 보이는’ 의미는 분명하나, 웃음의 타이밍이 한 박자 빠르다 싶을 때가 이따금 있었다. 어느 날에는 너무 밝은 웃음인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한정된 러닝타임 안에 극복의 서사를 보다 또렷하게 전달하기 위함임을 알지만 그래도 웃음의 점층화가 필요하다 여겼다. 단계를 쪼개고 또 쪼개어 나타날 웃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만났다. 바로 오늘.
형제를 보내고 사랑을 보낸 그가 검을 향하여 땅으로 무너지듯 내려앉았다. 두 손으로 땅을 짚어 지친 육신의 무게를 견디며 잠시 운명의 검을 바라보았다. 이어 회피하지 않고 쥐어올리는 손길에서 온갖 감정이 묻어났다. 하지만 어쨌든 다시 손안에 쥔 운명,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된다면.. 다리의 힘으로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며 그가 들려주었다.
‘피하지 않으리라.’
바위산 앞으로의 몇 걸음. 파노라마처럼 스쳐 가는 지난 일들. 하나하나를 되짚던 그가 질끈 눈썹에 힘을 주더니, 코끝으로 왈칵 뭉쳐든 회한을 삼켰다. 힘줄 솟은 미간이 땀범벅이 되어 경련했다. 그렇게 몇 차례 설움을 억눌렀다. 몇 번이고 스스로를 어르다가, 문득 애쓰는 스스로를 보기라도 한 것일까.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일순간이었던 그것은 너무나도 힘겨운 미소였다. 6월 말 7월 초와 같은 맑은 웃음도, 7월 14일과 같은 쓴웃음도 아니었다. 온 힘을 끌어모아 애써서 굳이 굳이 지어보이는 웃음이었다. 안간힘을 다하여 힘겹게 올린 입꼬리는 얼마 가지 못하고 찡그림 속에 묻혔다. 잠시 웃어 보였어도, 그 순간을 버티고 있는 것이ㅡ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지금의 그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여실히 전달되는 대목이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바위산을 뒤돌아보았다. 오늘따라 운명의 산을 돌아보는 찰나가 길었다. 옛날을 되새기는 동시에 다시 오를 길을 가늠해보기라도 하는가. 그의 뒤통수를 따라 나도 거대한 산을 올려다보았다.
아득히 먼 길.
산길을 오르며 몇 번이나 헛디디고 비틀댔는지 모른다. 운명은 어느 순간에도 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다시 밟은 정상. 산 아래에서보다 한결ㅡ그렇다고 해보았자 아주 조금일 뿐이지만ㅡ가벼워진 얼굴의 그가 잠시 미소를 지었다. 산 아래에서보다 조금 더 밝게, 더 분명하게. 그 앞에 펼쳐진 길을 향하여.
이어 맹약하듯 검을 들어 올렸다. 오래전의 시작과 같이.
산 위에 서서 어느 때보다 힘차게 검을 들어 올리는 이,
운명 앞에 물러서지 않고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 진정한 왕이었다.
*
“그러니까 내가 형이 있을 때만 싸우는 거잖아.”
“내가 항상 널 지켜줄 순 없잖아!”
랜슬럿의 타박에 고개를 땅으로 푹 꺼트린 아더,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절이 되지 않는 걸 어떡해.. 답답한 얼굴이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말했다.
“내가 케이한테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한껏 속상한 얼굴이었다.
“이럴 때마다 내 자신이 정말 싫어요.”
입술이 잔뜩 나온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18세 인생 최대의 고민이겠지. 지난주의 새로운 억양을 이어가면서도 부드러움을 가미한 소리에서 선한 천성이 묻어나는 듯했다.
“준비가 되었다.”
오랜만의 D, 그래서 오랜만에 훤히 보았다.
“무슨 준비요?”
되묻는 동그란 눈동자. 용의 불길을 경험한 뒤 멀린에 대한 의심을 거둔 눈이 어떤 편견이나 적의도 없이 되묻는 모습을 대체 얼마 만에 정면으로 보는지.
“만약 실패한다면요?”
머뭇거리는 눈은 또 얼마 만인지.
〈내 앞에 펼쳐진 이 길〉. 각오의 소절 “용기를 내.” 오늘은 용기에 맞추어 불끈 주먹을 쥐었고(객석으로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곧바로 그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끌어모은 용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렇게 결심을 굳히는 듯이.
이윽고 운명을 만난 아더. 오랜만에 검을 뽑은 뒤의 박수가 없었다. 소리가 거세된 공간에서 강렬한 백색 조명을 받으며 선 그는 정말로 어떤 계시를 눈앞에 둔 사람 같다. 신성하기도 하고, 장엄하기도 해. 오늘 공연의 좋았던 순간의 하나.
〈검이 한 사람을〉. 케이, 가웨인, 친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기쁨과 고마움, 벅찬 감격으로 물들어가는 장면을 보는 건 참 즐겁다. 눈썹을 끌어내려서도 웃고, 입꼬리를 특유의 동그란 곡선으로 말아 올려서도 웃는다. 랜슬럿이 나타나기 전까지, 여기 아더와 소꿉친구들이 얼마나 화기애애하게 의기투합하는지 보는 마음이 다 흐뭇해.
“그걸 다 어디다 해요?”
이제는 완연한 신뢰를 머금고 반짝이는 눈이 멀린에게 물었다.
“여기, 카멜롯 자리에.”
멀린의 대답에 두 눈으로 현재와 미래의 ‘카멜롯’을 더듬어 보는 시선을 보았다. 맑은 눈에 희망과 기대가 새록새록했다. 아직 스스로에 대한 의문은 있지만, 그래도 어쩌면.. 아버지와 멀린, 그리고 흔쾌히 맹세해준 친구들과 함께라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희망을 품어보는 18세의 아더였다.
이어 기네비어의 요란한 등장. 친구들과 기쁨의 여운을 만끽하던 중 시선을 빼앗긴 아더. 케이를 돌아보며 “아는 사람이야?” 묻는 입 모양을 읽었다.
〈이렇게 우리 만난 건〉. 듣기에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오늘의 듀엣. 부드러운 소릿결, 서로를 향하여 사근사근 녹아가는 마음이 이끌어가는 합창이었다.
〈왜 여깄어?〉. 모르가나의 등장, 놀라운 진실 앞에 부푸는 눈동자를 옆얼굴 아닌 정면으로는 너무나 오랜만에 보았고 새삼 충격이었다. 놀라서 한껏 부풀었다가, 점점 심각하게 굳어가는 눈동자의 섬세함이 충격적일 만큼 좋았고 새삼 너무 잘생겼어서도 놀랐다..
또 하나 오늘의 D에서 볼 수 있었던 건 모르가나의 표정. 처음 만난 동생이 잡아오는 손에 흠칫 눈빛을 곤두세우며 경계했던 그녀였는데..
“이 세상 그 어떤 아빠가 자식을 내다 버리나.” 를 합창할 때가 되어서는 경계를 살짝 내려놓고 울컥한 듯 찡그리고 마는 얼굴에서 느꼈다. 이 순간, 토로하는 원통함만큼은 모르가나의 진심임을. 아마 모르가나가 아더 앞에서 가장 솔직한 순간이지 않았을까.
문득 생각했다. 멀린이 재회한 모르가나가 원하는 걸 하나라도 주었더라면.. 그녀의 불화살이 아더에게로 향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그랬더라면 펜드라곤 남매, 서로를 해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도 있었을까..
〈오래전 먼 곳에서〉. 달랑 두 잔을 마시고 술에 취한 연기가 점점 깊어진다. 아닌 듯 휘청이는 고개, 굽이치는 손가락, 유려할 정도야.
멀린에게로 날아가듯 다가가 끌어안으며 건네는 대사가 또 한 번 뒷문장과 합체했다.
“오늘은.. 정말 이 모든 게 당신 덕분이에요.”
오늘은-까지 말하고는 아참, 이게 아닌데.. 잠시 문장을 끊어가는 그를 느꼈다. 못내 귀여웠어.
“이 세상이 내 것만 같아요.”
세상을 다 가진 화사한 얼굴의 아들 곧장 뒤로 쓰러지는 아버지가 담기는 D의 시야. 참 세상 슬프고도 잔인한 각도.
축객령은 오늘은 다시 “너도 나가”로 돌아왔다.
〈혼자서 가〉. 아더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잖아, 케이의 염려 어린 말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친구들이 얼마나 아더를 믿고 묵묵히 기다려주고 있는지를 보았다. 랜슬럿과의 한바탕 싸움 후에 모두 아더를 따라가는 것만 보아도.. D에서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아더에게로 황급히 달려가 한쪽 어깨를 끌어안으며 발맞추어 나가는 친구의 등이 보인다. 스스로는 외롭고 혼자인 것만 같다 여기겠지만, 그래도 곁을 지켜주는 이들이 있음을 두 눈으로 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참 노래하며 검을 뽑아 들 때 오늘 조금 버벅버벅 힘겨웠지? 멋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그만 귀여웠어서 어쩌지, 아더.
곧이어 텅 빈 공간 속으로 홀로 걸어 들어오는 아더ㅡ심장의 침묵 인트로. 오늘의 그는 울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으로 슬퍼하고 있었어.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다기보다 화가 날 정도의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야만인과 같다니.. 너를 막아서라도 지키겠다니.. 더없이 잔인한 질타였다. 사랑도 우정도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확인사살과도 같은 대화. 그가 무너질 만 하지 않나. 더더욱 아버지를 잃은 상실에 투신할 법하지 않나.
이어서 D에서 정면으로 보는 심장의 침묵은 참 잘생겼더라! 아무래도 눈이 맞은 것 같아! 하하...
참 “감히 왕 앞에서 말할 땐, 좀 더 조심해야 할 텐데..”는 완전하게 원래의 톤으로 돌아왔다.
〈이게 바로 끝〉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에 싣는 의심이 점점 분명해진다.
그러나 결국은 누이의 각본대로 무너지고만 그, 오늘은 두 손으로 누이에게 의지했다. 늘 누이의 손을 잡지 않은 오른손으로는 정처 없이 허공을 헤집곤 했는데.. 한 손은 누이의 손을 꼭 쥐고, 다른 손은 누이의 어깨를 잡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제대로 앞도 보지 않으면서.. 이끌리는 대로 몸을 맡겼다. 누이가 그를 배신의 눈앞으로 데려다 놓으리란 것도 모른 채.
으아아아.. 길고도 긴 비통한 울음. 칼을 움켜쥐고 달려오는 그가 곧장 정면인 황홀함도 잠시, D에서 마주 보는 엄기준 랜슬럿의 표정이 얼마나 냉정하던지. B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 랜슬럿의 바로 뒤에서 격하게 치미는 감정들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와 너무나도 상반되는 얼굴이었다. 두 사람을 나란히 보노라니 아더의 분노가 내게로 옮겨오는 느낌이었을 정도로.
마지막 순간, 누이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 이를 악물고 눈을 치켜세운 누이가 말없이 전하고 있었다. 인생이 네 뜻대로 되지 않는 나락을 너 또한 경험해보렴. 혼자가 되어보렴. 공포에 떨어보렴. 참혹함에 완벽하게 굴복해보렴. 지옥의 문 앞에 이제는 네가 설 차례란다.
“멀린, 왜 나를 혼자 버려둔 거야..”
오늘은 울음이었다.
“난 배신 당했어. 그것도 내가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에게.”
여기, 비틀비틀 허공을 떨치며 나아가는 손이 참 아이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 그럼 난 실패한 거야.”
오늘 새로 덧붙여진 ‘그래’의 체념한 웃음이 귀에 꽂혔다. 안타까웠다.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면 안 돼, 아더.. 멀린이 바로 그의 말을 부정해주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평원에 날 묻어〉. 조각난 목소리로 그가 길게 울었다.
혀어어어어엉. 끊어질 듯 위태로운 울음을 안간힘을 써서 이어갔다. 소리를 조각조각 붙였다. 그래서 오늘 더 길게 울었다.
기진맥진하게 일어서는 모습, 이승을 스치는 죽은 이의 행렬과 힘겹게 뒤따르는 남겨진 사람. 그를 향하여 천천히 다가오는 또 한 사람.
D의 각도에서는 사랑과 우정이 교차하여 다가오는 이 대목이 참 잔인하다. 떠나는 사람과 곧 떠날 사람이 한 시야에 적나라하다. 오랜만의 D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기분이 좋지 않았어. ㅠ
〈오래전 먼 곳에서 리프라이즈〉. 무릎 꿇은 그, 혼자 일어서는 그, 흐르는 눈물로 상처를 씻어낼 수 있기를 희망하며 그녀의 뺨을 감싸 쥐어 보지만.. 오늘의 그녀는 그 손길조차도 피했다. 흠칫 놀라며 옆으로 비켜나는 고개에 내 마음이 조각조각 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그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애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붙잡을 수 없다는 걸.
비극이 된 사랑, 이제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울지마, 샤아더 내가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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