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공. 내 고통의 일주일에 종지부를 찍는 공연이었다. 자기 자신이 망가트린 영혼의 함몰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사랑할 수 있고말고.
넌 구원 받을 수 있어, 도리안. 죽어가는 이의 마지막 숨에 웃음이 묻어났다. 바람 새는 소리처럼 옅게 그을려진 웃음. 처음 있는 일. 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그 웃음에 그의 눈동자가 뒤틀렸다.
끔찍한 꿈에서 그제야 깨어난 얼굴이 눈앞에 닥친 현실을 부정하며 무너졌다. 울음이 빨랐고, 뒤이어 차마 부를 수 없는 이름을 신음처럼 뱉어냈다. 죽은 이의 육신 위로 제 몸을 겹쳐 무너지고 나서야 가까스로. 자신이 죽인 이름, 배질을.
내 다락방에 죽은 지 열 시간이 채 되지 않은 남자 시체가 있어요. 그걸 좀 없애주세요.
앨런에게 인의를 저버린 행위를 지시하는 얼굴이 새하얬다. 두리번거리는 눈동자, 어딘지 다급한 말투. 늘 무정하리만치 평온하였던 모습과는 달랐다. 쫓기듯이 황망한 기색이 한쪽 어깨를 채 덮지 못한 옷차림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처음으로 이 순간의 그가 인간적으로 비추어졌다.
이어진 사라진 아름다움. 낮공에서도 없었던 밤공만의 변화. 이번 한 주의 모든 번민을 잠식시켜 주었던. 보면서도 믿기지 않아 눈꺼풀에 맺힌 눈물을 깜빡여내야 했던.
배질이 살해당했을 거라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 넌지시 물으며 웃는 얼굴인 건 같았으나, 역시 처음으로 인간적이었다. 비정함마저 흐르던 이전의ㅡ뻔뻔하기까지 했던 그 비인간적인 얼굴이 아니었다.
분명하건대 그건 고통의 웃음이었다. 뼛속까지 사무친 죄악감을 가까스레 웃음으로 가장해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숨겨내지 못한 고통의 얼룩이 두 뺨의 음영을 따라 묻어났다. 자신이 뿌린 죄악에 심장이 그을린 눈이 새까맸다.
그러니 그렇게나 속절없이 무너질밖에.
초상화 어딨느냐는 헨리 워튼의 한 마디는 작은 파도였으나 간신히 쌓아 올린 모래성의 뻔뻔함을 무너트리기에는 충분했다.
난, 난, 그 그림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 그림을 떠올리면 어떤 연극이 떠오르는데, 아, 아마 햄릿일 거예요.
더듬더듬 말조차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입술이 호소했다. 나의 이 고통을 알아봐 달라고. 헨리 워튼만이 선사할 수 있는 타락의 주문을 한 번 더 들려달라고. 그것으로 이 죄악감을 씻어낼 수 있게 해달라고. 제발 도와달라고.
그러나 더는 없었다. 구원이라는 이름의 타락은 더는 허락될 수 없었다.
헨리, 헨리, 헨리. 세 번을 부르고도 잡지 못하는 뒷모습이 끝을 직감하고 우뚝 멈추어섰다. 다급한 마음이 서둘러 따라 쫓으며 '뛰었음에도' 남겨진 등.
혼자된 뒷모습의 침묵이 길었다. 울음을 삼키는 숨소리가 연거푸 세 번, 들려왔다. 서서히 돌아서서 정면의 얼굴을 보여주는 턱에서는 미세한 경련을 보았다. 기어이 오고야 만, 그토록이나 두려워했던 결말에 몸부림치는 침묵의 얼굴이었다. 서글픈 눈동자에 눈물이 그 처연한 뿌리를 내렸다.
그림 속 저 사람 도대체 누군가. 제 영혼의 얼굴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는 얼굴이 회한했다. 싱그러웠던, 밝게 빛나던. 더는 없는 라일락의 순수를 그리며, 끝내 오늘은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울음을 쓰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하얗게 바래버린 초상화 앞에서 굳은 몸이 희미해진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떨리는 손끝이 뿌옇게 바랜 옛 기억 속의 얼굴에 닿아 한 번, 또 한 번 어루어만졌다. 회한하듯이, 뉘우치듯이. 그 언젠가처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옛날을 더듬는 손끝이 물을 먹은 듯 더뎠다.
옛 얼굴을 보는 눈이 생 없이 깜빡였다. 존재의 이유를 잃고 아름다운 겉껍데기가 된 육신. 형언하기 어려운 애상이 깃든 얼굴이 어느 사이엔가 손에 쥔 칼을 꼭 쥐더니, 그대로 생을 그어냈다. 무색의 핏방울이 따가운 조명 속에서 화르륵 피어났다. 터덜터덜, 생을 잃어 갈피 없어진 걸음이 금세 고꾸라졌다. 풀썩 쓰러진 육신 위로 죽음의 푸른 빛이 드리워졌다. 서리 내린 듯 바들바들 떠는 몸이 한없이 작았다.
황금빛. 천국. 소년. 눈앞의 허상을 향한 서글픈 미소. 어제 이상의 아름다운 미소였다. 회한이 빚은 아름다움이 숨을 멎게 할 정도로 처창했다.
아름다운 소년이 나를 부른다. 아스라이 뻗은 한 손은 마치 그 소년의 얼굴을 어루어만지는 것 같았다. 어느 사이엔가 슬픔이 되어 버린 그 얼굴을. 심장이 없었던 오랜 고통의 얼굴을. 바로 자기 자신을.
힘없이 뻗어졌던 가녀린 손끝에 맺힌 마지막 음절이 끝내는 울음으로 바스라지며, 그의 시간이 영영 멎었다.
그가 뿌린 죄악에 걸맞는 더없이 쓸쓸한 죽음이었다.
어느 때보다 처절하게 무너지는 그를 보며 나는 감사했다. 덧없이 쓸쓸한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순적이게도 이제 여하의 번뇌 없이 그의 마지막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실로 오랜만에 그를 위한 구원의 기도를 올리며, 그를 위해 울었다.
초상화를 쓸어내리는 손. 너무 아리지만 애틋하여 다시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되었구나.